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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국회의원 10명이 17대 국회의원으로 받은 첫 세비 840만원 중 노동자의 평균 월급인 180만원을 제외한 나머지를 정책연구비 등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당에 헌납했다고 한다. 원래 민노당 의원들이 국민에게 약속한 사항이니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요즈음 돌아가는 국회 행태를 보면 그나마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의원들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개원 23일 상임위조차 구성 못해 17대 국회 임기가 시작된 지 벌써 23일이 지났다. 그동안 국회가 한 일은 국회의장단 구성, 의장 개원사와 대통령의 개원 축하연설을 들은 것이 전부다. 총 회의시간으로 따지면 3시간 조금 넘는다. 물론 3시간 정도의 회의 참석으로 받은 봉급은 아니지만, 여하튼 거액의 봉급을 받으니 대단한 고급 직업이라는 생각도 든다. 여야 대표를 비롯한 국회의원들은 국회가 개원되기도 전에 국민에게 얼마나 많은 약속을 했던가. '싸움을 하지 않는 상생 국회', '생산적 국회', '민생 국회'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5월 3일에는 정동영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국민 앞에 상생정치를 하겠다는 '합의'보다 더욱 강도가 높은 '협약'을 발표했다. 그러나 지금 국회는 '협약'에 의한 상생은 고사하고 자리다툼 싸움이나 하고 있다. 그것도 스스로 만든 국회법까지 위반하면서 대국민 약속을 어기고 있다. 국회법 제15조에 의장과 부의장은 총선거 후 최초 집회일에 선출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첫날인 5일 의장만 선출하고, 부의장은 이틀 뒤인 7일에 선출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국회는 그 후에도 계속 반칙이다. 국회법 제48조에 상임위원의 선임은 최초 집회일부터 2일 이내, 또한 제41조에 국회 상임위원장의 선출은 최초 집회일부터 3일 이내에 하는 것으로 규정돼 있다. 이 규정대로라면 7일에는 상임위원 선임을, 그리고 8일에는 상임위원장을 선출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려 2주일이 지나도록 상임위가 구성되지 못했으니 어떻게 '상생 국회'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역대 최악의 국회라는 제16대 국회도 최소한 첫날은 국회법을 어기지 않았다. 상임위원 구성과 위원장 선출은 서로 싸우다가 16일 만에 끝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지루하게 싸우지는 않았다. 문제가 된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상임위 전환은 이미 기본 원칙에 합의했기 때문에 다만 시기의 문제다. 위원장 배분은 관례에 따르면 된다. 국회의 제1당과 제2당의 위치는 영구불변도 아닌데, 왜 억지만 부리고 있는지 국민은 답답하다. 지금 얼마나 많은 국정 현안이 쌓여 있는가. 전국을 들끓게 하는 신행정수도 이전, 병원노조 파업, 이라크 추가 파병, 주한미군의 대규모 감축, 북한 핵 관련 6자회담, 국민연금, 일자리 창출, 태풍 피해 등등 현안이 산적해 있는데 국민의 대표기관이라는 국회가 본회의는 물론 상임위 한번 열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민초만 불쌍하다. 오죽하면 '지둘려'라는 별명의 김원기 국회의장이 화가 나서 '서둘러' 의장이 돼 국회법에 부여된 권한을 행사하겠다고 했겠는가. 상임위원장 배분 하나 협상을 못해 의장에게 권한을 빼앗기는 여야의 정치력이라면 제17대 국회의 앞날이 걱정된다. 여야가 상생을 못하면 의장은 정치력을 발휘해야 하며, 또한 부여된 의장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스스로 만든 법도 안 지켜서야… 국회는 입법기관으로서 법 제정만 하면 끝이 아니다. 국회 스스로의 운영을 규정한 국회법부터 제대로 지켜야 한다. 그게 가장 기본적인 책무다. 이제라도 여야는 총선 직후 국민에게 보여 주었던 초심을 되새기고 최소한 국회 원 구성이라도 해서 일자리와 국민연금과 태풍과 파병 문제의 와중에 상심한 국민에게 위로의 말이라도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동아/04.06.21/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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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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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보면 도시라든가 국가는 인류의 이동생활이 끝나고 정착단계에 들어가면서 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목민에게 있어 국가니 도읍이니 하는 것들은 농경민의 경우와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천도(遷都)라는 것도 어쩌면 정착생활을 하는 농경민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역사 상 최초의 천도는 단군이 세운 고조선 때의 일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 조에는 여러 개의 지명이 보이는데 우선 환웅(桓雄)이 세상에 내려와 처음 자리잡은 백악산(白岳山) 신단수(神壇樹) 아래 신시(神市)가 있고, 그 후 단군이 태어나 고조선을 세우고 처음 도읍한 곳은 평양성이라고 하였다. 이어 단군은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阿斯達)로 옮기었다고 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천도이다. 삼국시대에 들어오면서 고구려는 졸본에서 국내성, 환도성 등 압록강 유역에 도읍을 두다가 427년(장수왕 15) 평양으로 천도하였으며 멸망하기까지 도읍이었던 곳은 586년(평원왕 28)에 천도한 장안성(長安城)이었다. 백제도 위례성, 한성 등 한강 유역을 도읍으로 하다가 475년 고구려에게 쫓겨 웅진으로 천도하였고, 538년(성왕 16) 다시 사비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삼국시대에는 물론 통일시기를 거쳐 고려에게 왕조를 내어줄 때까지 줄곧 경주 한 곳만을 도읍으로 삼았다. 천도를 안 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으나 분명한 것은 수도를 옮기자는 논의는 여러 차례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본기에는 통일 직후인 689년(신문왕 9) 왕이 달구벌(達句伐)로 천도하려다 그만두었다는 간단한 기록이 별다른 설명 없이 전하고 있다. 통일 후 신라는 왕이 거처하고 있는 수도가 국토의 동남부에 편재(偏在)해 있는 약점을 보강하기 위하여 5소경(小京)제도를 두어 운영하였다. 동, 서, 남, 북, 중원경을 두어 지역적 한계로 인한 통치력의 공백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발전은 경주지역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100여 년 뒤 지방 호족세력의 발호와 권력을 둘러싼 귀족 내부의 파쟁이 일기 시작하더니 10세기에 들어 급기야 최후를 맞고 말았다. 하지만 경주 한 곳에 도읍했던 것이 신라 멸망의 원인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이처럼 신라를 제외한 고대사회에서의 천도는 대부분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그 경위를 확인할 길이 없는 고조선시대의 천도는 차치하고라도 고구려나 백제사에 있어서의 천도는 거의 모두가 전쟁이나 외침 등 외부로부터의 영향이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그 이후 고려는 몽고 침입 때 잠시 강화도로 천도하였다가 귀환한 일이 있었고, 조선의 경우는 한 번도 천도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고려는 특이하게도 수도인 개경과 함께 서경, 남경 등 3경(京) 제도로 국정을 운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 이상 서경으로의 천도를 위한 끈질긴 시도가 있었고, 말기에는 한때 한양으로의 천도가 추진되기도 하였다. 신왕조 개창 후 긴 논란 끝에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조선시대에도 여러 차례 천도 논의가 있었고, 후기에 와 정조는 수원으로의 천도를 결행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기도 하였다. 최근 행정수도 이전 문제를 놓고 한동안 소란하던 끝에 어느 날 갑자기 '천도'라는 용어가 튀어나왔다. 어차피 이 말을 꺼낸 이들도 천도면 안 되고, 이전(移轉)이면 괜찮다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천도'라는 용어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엉뚱한 소동은 이쯤에서 접어야 한다. 개인집의 이사도 어려운 법인데 국가의 막중지대사이다 보니 시끄러울 수밖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긴 역사의 안목으로 보아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인가를 가늠해보는 일일 것이다. (경인일보/04.07.02/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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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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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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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지니아텍 (Virginia Tech) 에서 박사과정으로 공부하고 있는 나는 아주대학교와 시카고에 소재한 Illinois Institute of Technology (IIT) 와의 복수 학위 제도를 통해 유학의 첫발을 내디뎠다. 시카고에서의 또 다른 학부 생활이 아마도 나의 전공인 기계공학을 실제 연구에 써먹을 수 있었던 첫 번째 기회가 아니었나 싶다. 물론, 아주대학교 대학원 연구실에서 한 학기 동안 인턴으로 있었지만, 그때는 나의 지식을 활용하기 보다는 배우는 입장이었다. 공부가 아니라 실제 연구·개발을 할 수 있었던 기회는 IIT에서의 두 번째 학기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장비 업체 캐터필러 (Caterpillar) 사와의 첫 프로젝트가 그것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커먼레일 디젤 엔진에 들어가는 인젝터 (연료 분사 장치) 의 누유를 개선해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사실, 학부생에게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봐도 깊은 지식을 요구하는 프로젝트는 아니었던 것 같다. 연구소 측에서는 석·박사급 연구원이 오랫동안 이 문제를 풀지 못하자, 깊은 시각보다는 보다 넓은 시각으로 이 문제를 바라볼 필요성을 느꼈고, 학부생인 우리들에게 기회가 주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은 경우이다. 석·박사 연구원들이 풀지 못하는 문제를 학부생들에게 풀게 하다니···.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가장 크게 인상 깊었던 것은 그것이다. 당시 학부생이었던 우리보다 더 많은 연구와 공부를 했던 연구원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학부생인 우리와 진지한 토론과 연구를 진행했다. 그런 점에서 가장 머릿속에 많은 것을 남겼고,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었던 프로젝트가 아니었나 싶다. 무엇보다 이 것은 학교 강의 시간에 과제로 주어지거나 소학회 혹은 동아리에서 주어지는 프로젝트가 아닌 실제 돈과 직결되는 기업과의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더욱 인상 깊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자신감이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시작한지 1년도 되지 않은 아시아계 학생의 이야기를 모두 진지하게 들어주고, 동등한 입장에서 토론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던 연구원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자신도 지금 박사과정 중이지만 학부생들과 내 전공분야에 대해 동등한 입장에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기가 수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최종 보고서 발표, 그때의 설레임, 긴장감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렇게 첫 회사 프로젝트 발표를 마친 후에 얻은 자신감은 그 이후에 수업 시간 프로젝트 발표 및, 학회 논문 발표 등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당시 배웠던 것처럼 지금의 대학원에서의 연구도 여러 나라에서 모인 석·박사 학생들과 함께 토론을 하며 진행한다. 이런 시간동안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하고,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부분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특히, 대학원에서 연구를 하다보면,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 하던 연구가 진척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럴 때 후배뿐 아니라 내가 하고 있는 연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동료에게도 그 해답 혹은 아이디어를 얻을 때가 있다. 그 분야에 깊이 관여되어있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쉬운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국의 대학원의 장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러 나라에서 혹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공부하고 연구한 것을 나눌 수 있고, 같은 현상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것 말이다. 한국에서도 그런 방식으로 연구가 진행된다면 적잖이 도움이 될 것 같다. 학부생 후배들이나 다른 나라에서 온 동료들과의 토론을 할 수 없더라도 서로 다른 분야를 전공한 사람들과의 토론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IIT에서의 또 하나 소중한 경험은 프로젝트를 하면서 프로젝트의 진행을 주도했던 교수님이었다. 미국 최고의 공대중에 하나인 MIT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와 UC Berkley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ley) 에서 학부 및 석·박사를 하셨던 분인데도, 프로젝트 진행 중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학부생인 우리에게 묻곤 하셨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전공 외의 분야까지 모두 섭렵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지금 버지니아텍 대학원에서의 지도 교수님도 마찬가지다. 연구를 하는 동안에 어려운 점에 부딪히거나 하면,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거나 방향을 제시해 주시지만 당신이 모르는 부분이 있거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아무리 어린 학생에게라도 물어보고 의견을 구하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 또 그렇다고해서 학생들이 교수님을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물론, 미국의 모든 교수님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이런 인간적인 실험실의 분위기 때문인지 학생들은 진심으로 교수님을 따르며 더욱 열심히 공부에 몰두 하고, 교수님들도 그런 학생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열심히 가르치시는 것 같다. 공부에는 깊이도 중요하지만, 그 폭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얼마만큼 깊은 지식을 폭 넓게 사용할 수 있고, 폭 넓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는 대학의 연구실을 벗어나 이 드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사람들과의 토론과 경쟁 속에서 그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과 접하고, 다양한 시각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울 수 있었던 경험의 기회를 제공해준 아주대학교에 정말 감사한다. 세계의 인재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얻은 이 경험과 지식은 내가 글로벌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하나의 무기가 되었다. 나는 지금도 이 무기를 멋지게 사용할 그 날을 손꼽아기다려본다. 이정우동문은 1995년 아주대 기계공학부에 입학하여, 2+2복수학위프로그램을 통해 2002년부터 미국 일리노이공대(IIT)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2003년 High Honor를 수여받으며 IIT를 졸업하고, 2003년 8월부터 버지니아텍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지난 2005년 석사학위 취득 후 현재 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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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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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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